결국 다니던 회사는 8월 1일자로 퇴사했다. 작년에는 수단을 다해 설득하던 보스는 이번에는 말을 듣자마자 알았다면서 내 퇴사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난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남겨진 사람들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퇴사일이 7월 31일이 아니라 8월 1일인 것은 그날이 마침 금요일이었던 것도 있지만, 8월 1일까지만 회사에 적을 두고 있으면 월말까지 의료보험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인사팀장에게 귀띔받아서였다. 퇴직금도 안 줘서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퇴사 사유를 해고로 처리해야 하는 이 저렴한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건질 것은 의료보험뿐이기도 했고.
아니나 다를까 미처 8월이 가기도 전에, 신경치료 끝난 지 10년도 더 지난 멀쩡했던 이빨 깊숙한 곳에 염증이 생겨서 크라운을 열고 신경치료를 다시 하고 씌우는 일이 생겼다. 변태 의사는 열심히 신경을 쑤시다가 염증이 터지면서 누런 고름이 쏟아져 나오자 사진을 찍어서 굳이 내게 보여줬다. 더럽게 아팠지만 용케 고쳐졌으니 이제 한동안 치과 갈 일은 없겠지 했다. 보험이 없었더라면 1500불 정도 나올 걸 600불에 막았다.
그리고 9월. 이 동네 취업시장은 요즘 구직자에게 호황이라고 들었는데 아닌 것 같다. 입사지원은 여기저기 많이 했는데 어쩐지 아무한테도 연락은 안오고,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긴 영업맨 D와 올해 초 어느날 갑자기 해고당한 인사팀VP K가 검수를 봐 준 내 이력서는 항상 블랙홀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우연히 알게 된 희제 친구네 아빠 B가 소개해 준 회사에 지원을 하고 나서 내 이력서에 대한 정직한 반응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던 일들을 아주 간단하게만 소개했을 뿐인데, 실제 나와 같이 일할 사람은 이력서에서 아주 자세한 내용까지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내용을 추가하고 좀더 다듬어서 다시 이런 저런 회사들에 입사지원을 했는데, 오오 입질이 온다. 별 이상한 리크루터들한테 매일같이 전화가 오고, 전화 인터뷰도 여러 번 하고, 그러다 마침내 한 곳에서 10월 6일 월요일에 직접 가서 면접을 보기로 약속이 됐다. 연봉은 전혀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가는 면접이고, 일본 회사라 괜히 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리크루터가 처음 보고 흠짓 할 정도의 미녀였다. 이왕 하는거 좀더 잘 알아보기 위해 링크드인을 뒤져서 거기 근무했던 사람 중 나하고 접점이 있는 사람한테 연락을 해서 이런 저런 조언도 듣고, 진행중인 다른 회사들과 또 이틀 후의 면접에 대해 얘기하면서 모처럼 아내와 즐거운 토요일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다.
가슴에 어쩐지 불편한 느낌이 왔는데 이게 갈수록 심해지면서 쥐어짜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옷 입고 운전해서 근처 응급실 병원에 가자는 아내에게 911을 부르라고 고함을 쳤는데, 이때 911 아니라 평소 가던 응급실에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호출 후 한 10분만에 출동한 911 대원들은 나를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데려갔고, 어쩐지 순식간에 나타난 심장전문의한테 가장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게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도착한 다른 수술의사에게 수술 일정을 듣고 중환자실로 이동.
"관상동맥우회술"이라는 그 수술은 10월 7일 화요일에 받았다. 심장 근처의 막힌 혈관을 우회하기 위해 다리에서 채취한 정맥을 꽂아 넣는 건데, 난 3개가 막혀 있고 한 개는 60% 이상 막혀 있어서 총 4개를 붙여 넣었다. 가슴을 열고 심장과 폐를 멈춘 상태에서 하는 수술이라 좀 무시무시하지만 의외로 흔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한결 걱정이 덜했다. 미국에서는 연간 50만 명이 이 수술을 받고 있는데 빌 클린턴도 그중 한명.
클린턴은 2004년에 이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유증으로 이듬해 또 수술을 받았고, 2010년에도 또 같은 증상이 나타났으나 그때는 그냥 스텐트 삽입술로 끝났다고 한다. 클린턴은 이후 비건으로 전향. 스텐트 삽입술은 내 아버지도 10년 전에 받으셨고, 전두환도 받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무튼 이제 수술 받은 지 꼭 1.5개월 됐고, 신기하게도 수술 받은 다음날부터 매일 조금씩 나아지더니 지금은 몇 시간 동안 아이키아 매장을 돌아다녀도 괜찮을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다. 그러면서 구직 활동도 다시 시작했고, 그때 면접 빵꾸낸 회사를 보니 아직도 채용중이고 해서 연락해 봤더니 심장수술 얘기 후 바로 아웃. 다른 회사 한 군데에서 면접을 봤는데 거기서도 떨어진 걸 보면 아무래도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료보험은, 보험이 끝난 날부터 2개월 안에는 연장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서 용케 다시 살렸다. 10월 4일에 발병했으니 7월말에 퇴사했다면 심란해질뻔 했는데 여기서도 운이 좋았다. 병원이 보험회사에 청구한 금액을 보니 378천불. 보험회사가 네고해서 병원에 실제로 지급한 금액은 130천불. 내가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아마도 5천불 정도일 것 같은데 아직 청구서가 안왔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그리고 집에서 회복하는 동안 친구들이 연락하고 찾아오고 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다. 텍사스 와서 6년 동안 그래도 이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 새삼 자랑스러워졌다. 고마운 사람들을 초대해서 음식이라도 대접해야 할텐데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걱정이다.
그러고 보면 20년 전, 1994년 9월에는 차에 받혀서 목뼈가 부러지고 무릎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었다. 그때도 운좋게 용케 살았는데 이번에도 조상님이 보우하사 목숨을 건졌다. 명절 때마다 정성들여 차례 지낸 보람이 있다. 다만 내가 20년 주기로 재앙이 일어나는 팔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올해 들었던 음악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들었던 건 아마도 Slash의 새 앨범인듯하다. 뮤직비디오는 솔직히 돈 좀 더 쓰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또 이런게 그때 그시절 스타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전체를 자발적으로 반복하면서 들은 앨범 아주 오랜만이다.